정액검사로는 알 수 없는 임신 가능성, 정자 DNA에 단서가 있을까?

남성의 생식능력을 평가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시행하는 검사는 정액검사입니다.
정자의 수와 운동성, 형태 등을 살펴보고 임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이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런데 정액검사 결과가 정상 범위라고 해서 모든 남성의 생식능력이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액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도 임신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존 정액검사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생식능력의 차이를 알아낼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최근 Human Reproduction에 발표된 연구는 정자 DNA의 후성유전학적 특징에서 그 가능성을 살펴봤습니다.
연구진이 주목한 것은 DNA 메틸화(DNA methylation)입니다. DNA 메틸화는 DNA 염기서열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데 관여하는 후성유전학적 변화입니다.
연구진은 미국 LIFE(Longitudinal Investigation of Fertility and the Environment) 연구에 참여한 자연임신 시도 부부 372쌍의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각 남성의 정자 DNA에서 일반적인 메틸화 패턴을 벗어나는 부위가 얼마나 많은지 확인하고, 이러한 변동을 종합한 EVOS(Epigenetic Variability Outliers and Stochasticity)라는 지표를 이용해 실제 임신까지 걸린 시간과의 관계를 살펴봤습니다.
분석 결과, EVOS 값이 높을수록 임신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EVOS가 가장 높은 상위 25% 그룹에서는 12개월 이내 임신할 것으로 추정된 비율이 66%였던 반면, 가장 낮은 하위 25% 그룹에서는 86%로 나타났습니다.
남녀의 연령과 체질량지수(BMI), 흡연 여부 등 여러 요인을 보정한 뒤에도 EVOS가 높을수록 월경주기당 임신 가능성이 낮아지는 경향이 확인됐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차이가 일반적인 정액검사에서 주요 지표가 정상 범위에 해당하는 남성들에서도 관찰됐다는 것입니다.
연구진은 정액량, 정자 농도, 총 정자 수, 형태 등 주요 지표가 WHO 기준을 충족하는 남성 285명을 별도로 분석했습니다.
이 집단에서도 EVOS가 높을수록 임신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기존 정액검사만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던 생식능력의 차이를 정자 DNA의 후성유전학적 특징이 일부 설명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번 연구만으로 DNA 메틸화의 변동이 임신 지연을 직접 일으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자연임신을 시도한 부부를 대상으로 한 관찰연구이기 때문에, EVOS가 IVF나 ICSI 치료 결과까지 예측할 수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EVOS와 생아출산 여부, 임신 주수, 신생아의 신체 지표 사이에서도 통계적으로 유의한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정액검사상 정상 범위인 남성을 구분할 때 운동성은 평가 기준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EVOS를 실제 임상검사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검증도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는 남성의 생식능력을 평가하는 방식에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까지 정자의 수와 운동성, 형태처럼 눈에 보이거나 측정할 수 있는 특징을 중심으로 평가해 왔다면,
앞으로는 정자 DNA의 후성유전학적 특징까지 살펴보는 것이 생식능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이번 연구는 기존 정액검사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평가 지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